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오지마 전투 (문단 편집) == 경과 == [[파일:attachment/marines-iwo-landing.jpg|width=100%]] 갑작스러운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과 동굴 벙커에서 쏘아대는 일본군 포병의 사격으로 인해 해안선에 상륙한 해병대는 혼란에 빠졌고 철저히 준비한 일본군의 포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미군도 질세라 동굴 벙커를 향해 대포를 쏘면서 벙커를 무력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반면 미 해병대는 해안선에서 머뭇거리면 죽는다는 인식이 확실시 하면서 빗발치는 총알을 뚫으며 진격해나갔고 너무 많은 미해병대의 수로 인해 부족한 보급으로 총알이 떨어진 일본군은 이내 미해병대의 필사적인 반격에 뚫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당일 쌍방의 인적 물적 손실이 막대하였고 개전 첫날에만 [[미합중국 해병대]] 2,500여 명이 [[전사]] 및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는 피해가 났다. 당시 전황 보고를 들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물론 일본군 쪽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오지마 수비군 22,000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5,000명 에도 못 미쳤고, 그나마도 태반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포로]]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미 해병대가 철저하게 일본군 수비대를 쓸어 버렸기 때문이고 일본군은 일본군대로 [[귀축영미]]로 세뇌된 상태라서 미군 포로가 되느니 수류탄을 까서 스스로 자살하거나 마지막 총검돌격으로 미군에게 스스로 죽거나가 일상 다반사였다. 설상가상으로 미해병대는 일본의 땅굴과 벙커에 대한 특효약이었던 [[화염 방사기]]를 동원해 벙커와 동굴을 통째로 태워 버리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공병]]대가 TNT를 던진 뒤 화염방사로 지져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켜 동굴 내부를 싹 쓸어 버리거나 불도저로 동굴을 메워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즉, '''다 죽어서 잡을 포로가 없었다.''' 소수나마 일본군 병사들이 항복하거나 낙오되어 미군에게 포획된 사례가 있었으나 당시 일본군 포로를 잡지 않던 해병대의 관습과 더불어 일본군의 악명 높은 가짜 항복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이들 역시 대부분 사살당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pqiJOq22VM&ab_channel=RememberWWIIwithRishiSharma| 이오지마 전투의 참상과 그의 동료 해병이 일본군 부상병을 처형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는 미 해병 참전 군인의 증언]] [[해군]] [[수병]]들과 해병대원들은 상륙 직전까지만 해도 "1주일 만에 끝나겠지? 저런 별볼일 없는 섬 따위... 일본 애들도 얼마 못 버틸 테고 말이야." 하는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로 전투의 전망을 낙관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일본군은 지연전을 목표로 섬 전체를 요새화시켜둔 상황이었다. 상륙 직후의 막대한 희생과 스리바치산 함락 이후로도, 미군은 구리바야시가 구축해둔 방어선으로 인해 섬 내륙 지역으로 더디게 전진하며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특히, 센다 사다스에 소장이 지휘하는 혼성 제2 여단의 강력한 저항에 미군은 3월 22일부터 여드레 동안 사상자 약 3,000여 명이 발생해 센다가 지키는 타마나 산을 우회해야 했다. 하지만 타마나 산의 일본군은 개전 17일후 폐쇄된 참호안에서 화염방사기에 타죽을 운명에 놓이게 된다. 센다는 쿠리바야시에게 옥쇄하겠다고 요청하나 쿠리바야시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본대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결국 미군의 공격에 본대에 합류 직전 센다 군은 전멸하고 센다와 참모진들은 자결했다. 이후 쿠리바야시는 센다의 최후를 보고 받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했다. 3월 26일, 쿠리바야시는 남은 병력 300여 명을 이끌고 마지막 돌격을 감행했으나[* 반자이 돌격이 아닌 제대로 된 돌격] 실패하였고 대부분 병력이 전사했다. 이때 함께 돌격한 쿠리바야시도 전사한 듯하다. 이것이 일본군의 마지막 조직적 공격이었다. 이 후 일본군은 이오지마 곳곳에서 일본군의 유격전이 있었지만 큰 피해는 주지 못했고, 일본군은 이 소규모 유격전 때문에 1,200여 명이나 전사했다. [[파일:attachment/FlameThrowers.jpg|width=100%]] 결국 1주일 만에 끝난다는 전투는 끔찍한 희생자를 만들면서 1개월 이상이나 계속된 끝에 예상대로 미군의 상처가 가득한 승리로 끝난다. 이 전투는 최초로 일본군보다 미군의 인명 피해가 컸던 전투였다. 물론 미군의 인명 피해는 부상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는 기존까지 미군이 겪지 못한 뼈아픈 참사였다. 물론 일본군 자체는 전 병력이 전사하다시피하여 사실상 궤멸했지만. 전 병력 110,000명 중 미 해군 및 해병대의 전사자는 6,821명, 부상은 19,189명에 실종이 494명이었다. 일본 육해군은 22,000명 가운데 4,000명만 남고 전원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뒤이은 [[오키나와 전투]]까지 합쳐져서 일본군에게 호되게 데인 미군은 쿠리바야시의 의도대로 일본 본토까지 공격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쿠리바야시가 이 전투를 통해 미국이 부담감에 눌려 일본과의 전쟁수행을 포기하고 협상에 들어가는 것을 기대한 것과 달리, 빠른 시일 내로 전쟁을 끝내야 했던 미국은 육군과 해병대의 일본 본토 상륙을 아직 유효한 카드로 생각하는 동시에 [[일본 본토 공습|공중 전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일본 본토 상륙작전때 이오지마처럼 일본군의 처절한 항전을 기억한 미군 상층부와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일본 본토 상륙작전 전에 [[맨하탄 프로젝트]]를 통해 완성된 [[리틀보이]], [[팻 맨]]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하는 원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